서론
발프로산(valproic acid)은 항뇌전증 효과 외에도 양극성 정동장애, 편두통 예방 치료 등 여러 적응증에 대하여 널리 쓰이는 약물이다. 다양한 약리 기전을 가지고 있으며, 주된 작용은 뇌 내 감마아미노뷰티르산(γ-aminobutyric acid, GABA)의 활성도 증가 및 전압개폐나트륨통로(voltage gated sodium channel) 차단, 히스톤 디아세틸라제(histone deacetylase) 억제 등이 알려져 있다[
1]. 약물 부작용으로 구역, 구토 및 간기능 장애, 혈소판 및 백혈구 감소, 체중 증가, 탈모 등 다양하며, 특히 신경계통의 부작용으로 이상운동증상도 포함한다. 발프로산의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이상운동증상으로 비교적 흔하게 떨림, 실조증(ataxia)이 있고, 더 드물게는 파킨슨증상(parkinsonism), 간대경련(myoclonus), 근긴장이상(dystonia) 등이 있다[
2,
3]. 이러한 발프로산으로 유발된 이상운동증상 전체에서 무도증의 비율은 약 4%로 드물고[
3], 국내에서는 현재까지 보고된 바가 없다. 저자들은 발프로산 복용 후 전신 무도증이 발생한 환자를 보고하고자 한다.
증례
70세 여자 환자가 2개월 전부터 전신에서 나타나는 이상운동증상으로 외래 방문하였다. 환자는 10년 전 교통사고로 인한 경막하 출혈, 뇌타박상이 있었고, 이러한 뇌손상 이후 인지 저하, 보행 장애가 발생하였다. 이후 인지 저하로 인하여 항상 보호자의 보호관찰이 필요하였고, 보행은 도움을 받아 실내에서만 가능한 정도이어서 외부 요양병원에서 지냈다. 3년 전에 전신강직간대발작이 있었고, 레베티라세탐(levetiracetam) 1,000 mg/d로 복용하면서 최근까지 발작은 없었다. 약 3개월 전부터 환자의 폭력성이 증가하였고, 레베티라세탐의 약물 부작용을 의심하여 레베티라세탐을 500 mg/d로 감량하고, 오르필서방정(sodium valproate) 600 mg/d를 투약 시작하였다. 약물 조절 약 1개월 후부터 환자의 얼굴 전체, 몸통, 사지가 불수의적으로 꿈틀거리고, 꼬이는 듯한 이상운동증상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증상은 하루 종일 지속되었고, 식사, 보행 등 일상활동에 큰 지장을 줄 정도로 심해져서 본원 신경과 병동에 입원하였다. 생체 징후는 모두 정상이었다. 전신의 이상운동증상이 심하여 안전을 위해 침상 억제대를 착용하였다. 신경계 진찰에서 의식은 명료하였으나 수용언어장애(receptive language dysfunction)가 부분적으로 있었다. 이마, 눈썹과 눈 주위, 입 주위 등 얼굴 전체의 불규칙적인 근수축과 혀를 내밀도록 하였을 때 내민 채로 가만히 유지하지 못하였다(Jack in the box tongue). 몸통 전체에서 불규칙적인 움직임으로 인하여 침대에서 들썩거림이 심하였고 양측 상지와 하지의 근위부에 동일한 양상의 이상운동증상으로 팔, 다리가 주변 물건에 부딪혀 발생한 타박상들이 관찰되었다. 근위부 뿐 아니라 원위부에서도 이상운동이 있었고, 주먹을 가만히 쥐고 있으라고 하였을 때 손가락이 계속 펼쳐지는 모습이 있었다(milkmaid’s grip). 이러한 전신의 이상운동증상은 무도증으로 판단하였고 전반적으로 신체 오른쪽보다 왼쪽에서 더 강하였다. 바뱅스키 징후(Babinski sign)가 왼쪽에서 양성이었고, 보행은 불가능하였다. 혈액검사(complete blood count, liver/renal/thyroid function test, electrolyte, serum glucose, HbA1c)는 정상이었다. 혈청 구리, 세룰로플라스민(ceruloplasmin), antistreptolysin-O, Lupus antibody, anti-phospholipid antibody, anti-cardiolipin antibody, cryoglobulin, homocysteine도 정상이었다. 뇌자기공명영상 검사 결과, 양측 전두엽과 측두엽에서 뇌연화(cerebromalacia)가 있었고, 10년 전 두부 외상에 대한 치료 당시 검사 결과와 비교하여 뚜렷한 변화는 없었다(
Figure 1). 뇌파 검사에서 광범위뇌기능장애(diffuse cerebral dysfunction)가 있었고, 뇌전증모양방전(epileptiform discharge)은 없었다. 혈청 발프로산 수준(serum valproate level)은 정상 범위였다. 레베티라세탐, 발프로산 이외에 복용 중인 약물은 코자플러스정(losartan 50 mg, hydrochlorothiazide 12.5 mg), 아리셉트(donepezil 10 mg), 쎄로켈정(quetiapine fumarate 28.78 mg), 리보트릴정(clonazepam 0.5 mg)이었고, 최근 수개월 간 레베티라세탐, 발프로산 이외에 다른 약물의 변화는 없었다. 전신 무도증 발생과 발프로산 투약 시기의 시간적 선후 관계를 고려하여 입원 1일째부터 발프로산을 감량하기 시작하였고, 무도증도 확연히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입원 1주일 후 발프로산은 완전히 중단하였고 전신의 무도증은 억제대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호전 경과를 보였다. 입원 2주일째 무도증은 완전히 호전되어 퇴원하였다.
고찰
발프로산에 의한 무도증의 기전에 대해서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발프로산은 다양한 약리 기전 중 감마아미노뷰티르산의 재흡수 및 분해 효소의 간접적인 억제로 감마아미노뷰티르산의 뇌 내 농도를 증가시켜 경련을 억제한다[
1]. 또한 시덴함무도증(Sydenham’s chorea)에서 발프로산이 오히려 무도증을 경감시키는 효과가 알려져 있음을 고려하면[
4,
5], 발프로산에 의한 무도증의 발생은 더욱이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도증 발생 기전의 단서가 될 만한 것으로, 문헌에서 보고된 증례의 대부분에서 선행하는 구조적 뇌병변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구조적 병변으로 출생전후기 뇌손상(perinatal injury), 외상성 뇌손상(traumatic brain injury), 뇌출혈, 양측성 창백핵 석회화(bilateral pallidal calcification), 다발성 피질 기저핵 석회화(multiple cortical basal ganglia calcification) 등 다양한 뇌병변이 보고되었다[
6-
9]. 대부분의 증례에서 상기의 구조적 병변은 기저핵을 침범하고 있지만, 꼬리핵(caudate nucleus) [
6], 전두엽 피질[
7] 등 기저핵 외 뇌병변만 있는 환자에서도 발프로산 유발 무도증이 발생한 증례가 있다. 이처럼 구조적 병변이 기저핵-시상피질 회로(basal ganglia-thalamocortical circuit)를 침범하는 경우, 그리고 페니토인(phenytoin), 카바마제핀(carbamazepine)과 발프로산을 병용 투약하는 경우 무도증 발생의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6,
9]. 이번 증례의 경우 10년 전 교통사고로 인한 양측 전측두엽(frontotemporal lobe)의 외상성 손상이 있었다. 외상성 뇌손상이 오른쪽 전측두엽에서 더 심하였고 무도증의 강도가 오른쪽보다 왼쪽 팔다리에서 확연히 더 심하였다는 점이 구조적 뇌손상과 무도증 발생 간의 관련성을 뒷받침한다.
기존 증례에서 무도증은 발프로산 감량 혹은 중단 후 증상이 호전되었고, 따라서 이러한 발프로산 유발 무도증은 특이반응(idiosyncratic response)이 아니라 발프로산의 용량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며 발프로산 제형 중 divalproex sodium sprinkle처럼 최대 혈중 농도(peak serum concentration)의 변동이 적은 약제로 바꿨을 때 무도증이 호전된 증례가 있었다[
6]. 이 증례에서도 발프로산 감량 후 증상이 수일 이내에 호전되었고 이는 기존 보고들과 일치하는 점이다.
뇌전증 환자가 발프로산을 포함한 항뇌전증약물들을 복용하던 중 무도증이 나타났을 때 임상적으로 뇌전증발작과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때 무도증을 경련발작으로 판단하여 항뇌전증약물을 증량하면 증상이 더 악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선행하는 구조적 뇌병변이 있거나, 페니토인, 카바마제핀 등의 다른 항뇌전증약물과 병용하는 경우에는 발프로산 유발 무도증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약물 조절을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